깊은 시간
박노해
생일 아침 문득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
이렇게 길게 살아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얕게 미지근하게 오래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생의 깊은 시간을 살다 죽고자 했는데
저 깊은 시간의 강물을 나는 두 번 건널 수 없다
뜨겁게 살다 젊어서 죽어
깊은 시간에 합류한 벗이여
살아남은 나를 너무 노여워 마라
살아 있는 나를 너무 부러워 마라
나는 부끄럽게 아직도 살아남아
깊은 곳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으니
자꾸만 가볍게 떠오르는 들뜬 시대에
부끄럽게 살아남은 나는
살아서는 너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나는
좋았던 벗이여
그래도 몸부림치는 내가 가여워
너는 깊은 시간의 중력으로
내 발버둥에 묵직한 돌멩이로
나를 끌어 당겨주고 있구나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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